조현병자들의 설교자

어느새 1학기를 다 마쳐갑니다. 종강예배를 드렸습니다. 종강예배 직후 학생들 자신이 신학을 하게 된 동기와 소명을 서로 듣고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세간에서 혹자는 말합니다. “현재 교회와 목회자─ 특히 목회자 ─는 포화상태이기 때문에 수급 조절이 필요하다”라고. 한마디로 이것이 ㄱ소리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의 ‘신학’ 하게 된 동기를 듣다보니 그 부르심의 고유성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 영역이란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대해 감히 ‘수급’이나 ‘생산성’ 따위를 적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곳에 필요해서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 학생 중 한 분의 소명을 예로 들면, 조현병자들이 요양하는 곳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여성 사역자의 이야기입니다. 본래는 그 요양소에 목회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목회자도 전도사도 없어 평신도인 본인이 홀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전합니다. 망상에 시달리는 환우들에게 말씀을 전하고자 그녀는 애씁니다. “그 망상만 없다면, 그 망상만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을 텐데…”라고 한탄하며 그 망상에 가로막힌 그들을 안타까워 합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그 예배 인도를 강요한 일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밖에는.

이 여성 사역자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에게도 귀신을 쫓고 말씀을 듣게 하는 은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르짖습니다. 그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는 중에 저는 문득, ‘이 분은 축귀의 은사를 사모하지만, 실은 더 큰 은사를 가지고 있다’라는 확신을 했습니다. 바로 ‘말씀의 은사’입니다.

대부분 말씀의 은사를 수많은 대중을 사로잡는 혀의 수법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사는 ‘듣기’의 은사입니다. 이 분의 경우는 조현병 환자들에게서 듣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저나 여러분에게는 전혀 없는 은사이기도 합니다.

이 여성 사역자의 안타까운 심정을 들으면서

이 여성 사역자의 ‘말씀’과 수천/수만을 청중으로 둔 메신저의 ‘말씀’과 무게를 달아보았습니다. 만나의 저울(법칙)이 생각났습니다.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_출 16장

우리는 작은 일에서 큰일 로, 혹은 모자람에서 풍족함으로의 발전 단계를 소명으로 생각을 하지만 이미 달리고(weigh)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한 주간 인터리니어 패드를 새로 설치한 이후에 여러 번의 업데이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차례의 업데이트를 냈습니다. 최종 버전은 1.0.18입니다.

‘카테타 패드’와 ‘인터리니어 패드’ 간의 충돌도 바로잡고, 몇 가지 인터페이스도 부드럽게 손봤습니다. 속히 업데이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