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적신학 » 대홍수 전엔 정말로 1000살까지 살았는가?



해석학적 주석을 작성 중입니다. 이제야 창세기 5장 넘어가고 있습니다(2021년 4월 현재). 창세기를 올해에는 끝내려고 합니다. (5장 이후는 당장 마땅한 한글 텍스트가 없어 수집된 공개 Notes를 임시로 담아놓았습니다. 지금의 제 생각과는 일치하지 않는 코멘터리가 포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참작하십시오.)

    파워바이블 주석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_창세기 4장23절

    • 창세기 4장23절에 관한 코멘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라멕이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이고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창상(創傷)으로 번역된 페차(פֶצַע)나 상함으로 번역된 카부라(חַבּוּרָה)나 모두 비슷한 상처이다. 한자어 창상이 총검 따위의 자상을 뜻하는 말이라면 오히려 페차보다는 카부라에 더 어울리는 말이다. 즉 사람을 죽인 것은 타박상 페차 때문이고, 소년을 죽인 이유는 칼로 베인 자상(刺傷)을 뜻하는 차부라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소년의 대비는 성인 남자와 어린 아이의 명백한 대비인 것이다. 어린이를 살해한 사유가 더 세야 하지 않겠는가. 노랫말과도 같은 이 시문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는 말은 다음 절에 나오는 “가인(칠배)보다도 라멕 자신이 더 보호를 받는다(칠십칠배)”는 문장과 연하여 자만 내지는 교만의 소리로 간주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동사 하라그티(הָרַ֙גְתִּי֙)는 종종 미래적인 사운드로 들린다는 논의가 있는데 대개 과거로 번역하기 마련이다. 만약 이 하라그티가 “내가 사람을 죽였다”가 아니라 민수기 22장 33절의 “내가 벌써 너를 죽였을 것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I should have killed)에서처럼 강한 어조라면 명백한 자만과 교만의 시어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라멕의 이 시구는 자만과 교만을 넘어 종말을 종언하는 시구임을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음 세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삶의 방식에 대한 자조이기 때문이다. 소년 예레드(יֶלֶד)는 문자적인 소년이라기보다는 아기/후손을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가 여기서 한 번 나오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기 이삭이 젖 떼는 날에 관한 이야기에 나온다(창 21:8). 이것이 라멕의 함정이며 가인의 족보를 두발가인(대장장이)이 아닌 두발가인의 아비인 라멕 자신이 종언을 선언하는 이유이다.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한 셋의 족보는 라멕(노아의 아버지)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아들 노아가 다음 세계/ 새로운 세상을 이어가고 있다. 이것이 라멕의 노래가 애가(哀歌)인 이유이다.

이 구절에 대한 묵상이나 경험을 남겨주세요. 살아 숨쉬는 주석을 만들어 주십시오. 삭제를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개발자 | 이영진
초기 개발년도 2000년 | 변경 기록
데이터 오류 및 문의사항은: 헤르메네이아 미문(美門)